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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는/임업인 인터뷰

맛과 향, 영양까지 뛰어난 우리 임산물 산머루를 만나다


 


임업도전기 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

맛과 향, 영양까지 뛰어난 우리 임산물 산머루를 만나다(이상인 대표)


어릴 적 시골 산촌에서 자란 우리 또래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오면 목동처럼 소나 염소에게 풀을 먹이는 일이 일상이었다. 나 역시 농촌과 산촌이 어우러진 시골에서 집안 농사일을 거들며 자랐다. 이후 집안 형편상 고등학교는 진학하지 못했고, 열여섯 살부터 서울로 상경해 여러 직장을 다니며 도시생활을 시작했다.


도시생활은 생각보다 고생스러웠다.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공부해 고등학교 검정고시와 야간대학을 마쳤다. 첫 직장은 출판사였다. 어릴 때부터 한적한 시골생활이 몸에 젖어 있어 그런지 도시생활이 각박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다시 고향을 동경하게 됐고, 귀농으로 성공해보겠다는 꿈을 꾸게 됐다. 그 때가 1985년이었다.


고향으로 내려오자마자 아내와 결혼했다. 아내는 옷가게를 운영하고, 나는 벼, 양파, 채소 등을 키우는 일반 농사를 지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농사일은 적자였다. 경제적인 위기가 찾아오고 아내와 친척들이 모두 농사를 반대했다. 당연히 포기해야 할 형편이었지만, 나는 위기가 기회라는 생각으로 아내에게 마지막 기회를 달라고 사정했다.


새로운 소득 작목, 산머루를 발견하다!



본격적으로 농촌에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일반 관행 농업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해 새로운 소득 작목을 찾아다녔다. 문득 어릴 때 산에서 따먹었던 머루가 떠올랐다. 다양한 머루 품종을 구해 시험재배를 시작했고, 우수한 머루품종을 육성해 점점 재배체계를 갖추게 됐다.


3,300㎡의 산머루농원을 운영하면서 생과도 팔고, 가내공업으로 산머루즙을 만들어 팔기도 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산머루는 맛과 향이 좋은데다 영양 성분도 우수하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점차 면적을 넓혀갔다.


숱한 거절과 도전, 미니공장을 세우다!


조그만 산머루 가공공장을 세우기로 하고 군청에 가서 농가들에게 산머루 재배법을 보급하고 공장을 세울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바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당시 산머루는 검증이 안 된 품목이어서 농가에 보급했다가 판매가 안 될 경우 행정책임이 따르게 된다는 이유였다. 그 후로도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군청 청사를 나올 때마다 허탈감으로 눈물이 아른거렸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여건을 스스로 만들기로 했다.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머루를 심게 했고 책임 수매형식으로 면적을 넓혀나갔다. 또 농공단지 내에 방치되어 있던 부도업체의 땅을 인수해 1998년 50평 규모의 미니공장을 만들었다.



설립 당시는 IMF 사태로 모두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나에게는 공장을 세울 자금이 전혀 없었다. 아내는 공장 세우는 것을 반대했고, 더 이상 돈을 빌릴 곳이 없었다. 내 선택은 딱 한가지였다. 토지대금은 장기 분할로 구입하고, 건물과 기계대금은 토지 담보와 신용대출로 은행에서 차입하는 것이었다. 기계라고 했지만, 모두 건강원 수준의 수동식이 전부였다.


아내에게는 비밀로 하다가 어느 정도 건물의 기초가 완성됐을 때 ‘아는 사람이 공장을 짓는데 구경이나 가자’며농공단지 현장에 데리고 갔다. 그 자리에서 이실직고 했다. 한동안 아내에게 냉대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공장을 가동하고 2년 동안 직원도 없이 혼자 산머루즙을 만들어 판매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군청에서 담당 직원이 인부 2명을 데리고 와서 공공근로로 배정했으니 직원으로 일을 시키라고 했다. 혼자서 일하는 것이 안쓰러워 군청에서 특별히 배려했다는 것이다.


뜻밖에 직원 둘을 얻은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사업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창업 3년만에 지자체의 도움으로 지역 50여 농가에 165,289㎡의 재배 면적과 원료를 확보하게 됐다.


사업의 돌파구, 해외 견학에서 찾다!


시중 판매도 늘려가며 자금이 확보 되는 대로 필요한 시설과 자재를 구입해 공장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그런데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매출이 클수록 이윤이 줄어들었다. 내가 가진 자본으로는 단순제조업으로 성공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전략을 세우기 위해 2003년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의 꽃농장과 약초농장을 둘러봤다. 그들은 특산물가공과 체험농장을 운영하며 도시민을 유치해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내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 미국, 캐나다, 프랑스를 들러 대단지 포도농장과 와이너리 산지를 견학했다.


이를 통해 3가지 원칙과 방향을 얻었다. 첫째, 지역주민들의 소득과 연계되는 산머루농사는 확대하고, 둘째, 명인정신으로 명품을 만들어 브랜드화 하며, 셋째 산머루테마 관광농업을 추진해 체험농장을 만들자는 것이다.


나는 산에서 자생하던 산머루의 자연 이미지와 임산물의 특성을 살려 독특한 산머루문화를 만들기로 했다. 지리산 줄기 해발 500m 고지의 기슭에 임야를 구입해 2004년 산머루농장을 만들었다. 가공공장 외에 와인동굴, 카페 등 도시민을 유치할 수 있는 산머루 체험농장도 직접 설계했다.


명품 산머루와인, 명인 정신으로 만든다!


조금씩 소문이 나면서 여러 방송국에서 찾아왔고, “논에 왠 산머루?” 라는 제목으로 우리 집 산머루가 소개됐다. 아등바등하며 발품을 판 끝에 조금씩 길이 열렸고, 지금은 품질이 좋다는 평을 받아 고객들의 꾸준한 주문 물량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



대형 유통업체에서 수차례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다. 원료를 적게 넣고 원가를 낮추어 저렴한 제품을 공급해주면 얼마든지 팔아주겠다고 했다. 원하는 대로 선금도 준다고 했지만 ,단박에 거절했다. 제품 하나 만큼은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명품정신으로 사업을 해왔기 때문이다. 값싼 제품을 만들면 당장의 어려움은 면하겠지만, 그동안 쌓아온 좋은 이미지는 돈 주고도 살수 없는 일 아닌가. 


와인을 제조하는 것은 상당한 기술력이 필요하다. 자문을 받아 여러번 와인을 만들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발효기술을 배워야 겠다는 일념으로 전문대학 발효학과에 진학했고, 2년 동안 공부했다. 이렇게 노력을 기울여 어렵게 만든 와인이기에 우리 집 산머루를 저렴한 제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절반의 성공, 산촌문화 창조에 앞장선다!


또 한 번 정면으로 돌파하자는 생각으로 온라인 홍보에 전력을 다했다.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수천 명에 불과하던 방문객 숫자가 온라인 홍보 1년 만에 15,000명으로 늘어더니 2014년에는 50,000명을 넘은 것이다.



올해에는 더 많은 도시민들이 찾아오고 있다. 방문객이 늘면서 매출도 늘고 직판을 통한 수익도 생겨 어려운 고비도 넘기게 됐다. 이제는 본격적인 관광농업으로 성장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임업인단체, 농업인단체, 행정기관, 사회단체 등에서 우리 두레마을이 성공모델이라며 견학을 온다. 그러면 한없이 쑥스럽다. 아직은 내가 꿈꾸는 것의 절반도 못 이루었을 뿐더러 성공모델로는 부족한 점이 많다.


이제 우리나라도 6차산업이 활성화되어 가고 있다. 앞으로 6차산업이 우리 산촌과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성장산업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산머루로 그 초석을 놓는데 일익을 담당하고자 한다.


끊임없는 창조와 혁신으로 전국적인 6차산업 명소를 만들고 산촌의 나무, 숲, 임산물, 공기 등 무한한 산림자원으로 미래의 산촌문화를 창조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