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소슬히 불어옵니다. 가을비가 내렸고, 낙엽이 길을 뒹굴기 시작하는 요즘, 밖을 바라볼 때마다 무작정 걷고 싶어지는데요. 걷기 좋은 곳을 떠올려보면 늘 가장 먼저 손에 꼽히는 곳이 고궁입니다. 발자국을 내딛으며 낙엽을 툭툭 치다 보면 시간마저 바스락거리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낙엽만 바라보다 보면 이곳에 어떤 나무가 있는지는 알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사실 궁궐에는 아주 다양한 나무들이 있습니다. 나라를 책임지는 임금이 업무 후 정서적인 안정과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텐데요.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유명한 궁궐에는 어떤 종류의 나무들이 있는지 살펴볼까요?
<단풍이 예쁘게 떨어져 있는 곳, 경복궁 향원정의 모습입니다>
조선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후에 1394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395년에 경복궁을 완성하게 됩니다.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을 가진 ‘경복(景福)’이라는 이름은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이 ‘시경’에 나온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하지요? 경복궁을 거닐다 보면 많은 나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침엽수로는 잣나무, 전나무, 주목, 향나무가 있고, 활엽수로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오동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등이 있습니다. 꽃나무로는 매화, 모란, 진달래, 개나리가 있고, 과일나무로는 복숭아나무, 앵두나무, 개암나무, 대추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복궁을 거닐며 가장 기억에 남는 나무는 가을의 상징, 단풍나무와 은행나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향원정 주변에서 빨갛게 타오르는 단풍은 북쪽의 백악산과 서쪽의 인왕산의 색깔과 어우러지면서 지금 내가 있는 곳의 계절을 실감하게 해줍니다. 향원정 남쪽과 동쪽을 따라 심어 놓은 단풍나무에서 떨어지는 단풍잎들은 충분히 감상에 젖어 걸을 수 있게 해줍니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지나가는 가을을 만끽해 보면 어떨까요? / 사진:문화재청 해리티지채널>
경복궁에서 가을을 느낄 수 있는 곳은 단풍나무 아래만이 아닙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은행잎을 떨구는 은행나무 역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데요. 특히 인상깊은 곳은 자경전의 북쪽 담장, 향원정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늦가을이면 온통 노란 물결로 가득한 이 곳에는 군데군데 벤치가 있어 지나가는 바람과 함께 가을이 깊어가는 모습을 마음에 담아둘 수 있습니다. 또한 경복궁의 돌담을 따라 천천히 낙엽을 밟으며 걷다보면 어느새 삼청동길로 접어들어 삼청공원을 향하고 있곤 하지요.
경복궁 근정전 왼쪽 연회의 장으로 사용되었던 근사한 경회루에도 눈에 띄는 나무가 있습니다. 능수버들인데요. 경회루 옆에 바람에 휘날리는 능수버들이 과거에는 활쏘기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최고의 궁수는 축 늘어져 흔들리는 능수버들의 잎을 관통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말채나무,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면 더욱 잘 달리게 되는 것처럼 나라가 더욱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채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 사진:천연기념물센터>
경복궁에서는 빠뜨릴 수 없는 나무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아미산 동쪽 밖에 있는 말채나무 인데요. 말채찍처럼 가늘게 늘어진 나뭇가지 때문에 말채나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주마가편이라는 고사성어처럼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면 더욱 잘 달리게 되듯 번창한 집안이 말채나무로 인해 더욱 번창하라는 뜻에서 심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말채나무는 하얀 꽃이 피면 멀리서도 알아볼 정도로 많이 피고, 둥근 열매는 가을에 까맣게 익습니다. 떨어진 잎이 아닌 나무를 살펴보면서도 충분히 경복궁에서의 산책은 즐겁습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어 유네스코에서도 인정하고 문화유산이 된 창덕궁의 전경입니다>
창덕궁은 태종 5년(1405)에 지어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1910년까지 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궁궐로 쓰였습니다. 이어서 성종 15년(1484)에 준공한 창경궁이 창덕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실제 궁궐의 기능을 수행했는데요. 이 두 궁궐을 합쳐 동궐이라고 합니다. 창덕궁의 노거수는 느티나무 32, 회화나무, 15, 주목 10, 은행나무와 측백나무 및 밤나무가 각각 2, 갈참나무, 굴참나무, 매화, 다래가 각각 1그루로 모두 70그루입니다. 이중에서 194호 700년 된 향나무, 251호 600년 된 다래나무, 471호 400년 된 뽕나무, 472호 400여년 된 회화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창덕궁에서 만날 수 있는 인상적인 나무는 돈화문을 들어서자마자 양 옆에 심어놓은 회화나무입니다. 나무 높이는 15.0~16.0m, 가슴높이 줄기 직경은 90~178㎝에 이르는 노거수인데요. 이곳에서 왕이 삼공(三公)과 고경대부 및 여러 관료와 귀족들을 만났다고 전해집니다. 삼공의 자리에는 회화나무를 심어 앉을 자리의 표지로 삼았다네요.
삼국시대 무렵 중국에서 들어온 회화나무는 우리 선조들이 최고의 길상목(吉祥木)으로 손꼽아 온 나무입니다. 특별히 공이 많은 학자나 관리에게 상으로 내리기도 했던 회화나무는 모든 나무 가운데서 으뜸으로 치는 신목(神木)입니다. 아름드리 큰 나무 아래에서 쉬었다가 창덕궁의 가을 풍경을 만나러 발걸음을 옮기실 때 빠뜨릴 수 없는 곳은 부용지와 애련지, 존덕정과 옥류천 일대의 모습입니다. 낙엽 떨어진 후원의 길을 걷다 보면 이곳이 도시라는 사실마저 잠시 잊게 됩니다.
<창경궁의 느티나무입니다. 창경궁의 역사와 함께 한 나무겠죠? / 사진:천연기념물센터>
또 다른 동궐인 창경궁은 태종 이방원의 처소로 세종이 지은 수강궁 터에 지은 궁궐이었습니다. 창덕궁이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의 역사가 이루어진 정무공간인 반면에 창경궁은 내조의 공간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창경궁은 일제강점기 때 가장 심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남아 있는 고목나무가 다른 궁궐에 비해 훨씬 적습니다. 창경궁에 100년 이상 된 고목나무는 느티나무 2그루, 회화나무 2그루, 주목 1그루, 황철나무 2그루, 백송 3그루 정도라고 합니다. 이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가 춘당지 남쪽에 자라는 500년 된 느티나무라고 합니다. 창경궁에서는 춘당지 주변과 후원 일대가 가장 중요한 산책 포인트라는 점에서 느티나무가 기여하는 부분도 크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창경궁 월근문 앞에 붉게 물든 단풍나무 숲의 모습입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만날 수 있습니다.
/ 사진:문화재청 해리티지채널>
<근대 역사의 주무대였던 덕수궁의 나무에도 단풍이 들기 시작합니다 / 사진: 덕수궁>
선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가로 출발한 경운궁은 광해군, 인조, 고종황제가 머물렀던 곳이자 우리나라 근대역사의 주 무대였습니다. 궁궐로서는 유일하게 석조전과 정관헌과 같은 근대식 전각과 서양식 정원, 분수가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인왕산 줄기 아래 아기자기한 전각들이 정감 있게 배치되어 있고 함녕전에서 석조전에 이르는 후원길은 산책을 사랑하는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덕수궁에서는 1904년에 큰 화재를 만나 불타버렸기 때문에 오래된 나무들은 대부분 없어져버렸습니다. 지금 있는 나무들은 대부분 그 이후에 심은 것이라는 점이 아쉽습니다만 그래도 영국대사관 쪽 북편 담 안쪽의 회화나무 등 몇 나무는 2~300년 된 노거수입니다. 석조관 옆 후문 앞에는 1913년 네덜란드 공사가 고종에게 선물한 마로니에 나무를 비롯해서 라일락 등 서양 나무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기보다는 산책의 계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며 거닐기 아주 좋은 날씨죠. 떨어지는 낙엽들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많은 감정들을 충분히 즐기면 좋겠구요. 더 머무르고 싶은 계절은 쉽게 지나가는 만큼 아쉬움이 남기 전에 시간이 잠깐이라도 나면 고궁을 방문해보시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분명히 좋은 기억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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