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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는/임업인 인터뷰

30대 임업인의 산마늘 성공기!



은은한 마늘 향과 쌉싸름한 맛이 일품인 산마늘(명이나물)은 고소득 특용작물로 우리에게 알려지며, 재배에 관심을 표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재배기간이 길고 저장이 어려운 탓에 대량생산이 쉽지 않기도 한데요. 천산농장을 운영하는 심정섭씨는 그런 산마늘에 자신의 청춘을 건 사람이죠. 남다른 집념으로 산마늘 박사가 된 그의 성공스토리! 지금 시작합니다~

 

<천산농장을 운영하는 심정섭씨>




심정섭 3억원을 투자해서 산나믈 모종을 구해 심기 시작했어요. 절대 실패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죠. 그야말로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마늘은 보통 한번 심어서 4~5년생이 돼야 수확이 가능한데요. 모종으로 심으면 작은 것은 2~3년, 큰 것은 올해 바로 수확할 수도 있죠. 전체 농장의 규모가 약1만평정도 인데, 다년생인 산마늘의 특성상 한번 심으면 경작지가 꽉 찬 상태로 몇 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구획을 나눠서 모종을 키워 팔기도 하고 돌아가며 수확을 하고 있어요.

 

서울에서 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 강원도 강릉시내를 벗어나 멀리 바닷가가 보이는 곳에 자리한 천산농장에는 겨우내 눈밭을 뚫고 나온 산마늘이 파릇한 잎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심정섭씨가 천산농장을 운영한지 8년여, 30대 초반에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 억대소득을 올리고 있는 농장을 돌이켜보며 우여곡절도 많았다고 합니다.

 

한때 남부럽지 않은 회사에서 설계업무를 담당하던 직장인으로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른 아침 출근해 늦은 시각까지 업무를 한 뒤 이어지는 잦은 회식 등 혹독한 생활에 심신이 지쳐가던 그에게 고향으로 내려와 함께 살자는 부모님의 제안이 있었다고 해요. 답답한 도시생활에 지칠 만큼 지쳐있던 그는 그렇게 도심생활을 정리했고, 그때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고 합니다. 강릉으로 돌아온 그는 휴경지로 있던 집안의 땅에 직접 경작을 해보기로 결심! 본격적인 귀농•귀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지식도, 경험도 없이 시작한 무모한 도전이 잘될 턱이 없었죠.

 

심정섭 지대가 높은 땅에는 남들이 하는 것처럼 감자와 무, 배추 등을 심었어요. 뭘 어떻게 얼마나 심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시작한 것이 성공할 리 없었죠. 그렇게 얻은 첫 번째 교훈은 다른 사람들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첫 실패를 거울삼아 시작한 것이 수익성이 좋다는 천마 재배였죠.

 

심기일전의 마음으로 도전한 천마재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연이은 실패였습니다. 또 한번의 뼈아픈 실패에 좌절할 법도 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실패의 이유를 하나씩 되짚어 보고 새로운 기준과 원칙을 세웠죠. 다행히도 지난 실패의 교훈은 고스란히 그에게 남아 시행착오를 줄이는 나침반이 됐습니다.

 

 

심정섭 몇 번의 실패 끝에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은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인건비 대비 수확량과 소득이 적은 작물도 제외했죠. 일정 기준을 세우고 다양한 연구자료와 정보를 수집하면서 향후 어떤 작물이 유망한지를 공부하다 보니 산마늘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재배기간이 길다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재배성공률도 높고 손도 많이 필요치 않은데다 희소성이 있어 이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시 산마늘은 오대산 일대와 울릉도에서만 재배되는 희귀한 임산물이었습니다. 더구나 밭에서 재배해 대량으로 생산하는 시도는 전무했죠. 심정섭씨는 오대산과 울릉도를 돌아다니며 적합한 품종을 찾았고, 산마늘이 유통되는 일본과 동남아 일대를 둘러보며 상품성을 확인하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시간! 모종을 심은 후 상품가치가 있는 산마늘이 출하되기까진 3년을 기다려야 했죠. 막연한 불안감과의 긴 싸움이었습니다. 그는 불안감이 들 때면 더욱 산마늘 재배에 매달렸고,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다행히 산마늘은 큰 탈 없이 잘 자라줬습니다.

 

심정섭 산마늘의 생명력은 놀라웠어요. 겨울에 눈이 쌓여도 끄떡없는데다 다른 작물은 다 죽어버리는 소나무 아래에서도 잘 자랐죠. 마늘 향이 강해서 짐승들이 먹어 치우는 일도 드물었어요. 한번은 잡초 제거하는 일을 잊은 적도 있었는데요. 며칠 뒤 폭우가 쏟아졌을 때 잡초 덕분에 산마늘이 쓸려가지 않더군요. 그 뒤론 잡초 제거도 하지 않았습니다. 풀이 무성한 상태에서도 잘 자라는 건 산마늘 밖에 없을 거에요.

 

<심정섭씨가 재배하는 산마늘>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흘러, 다자란 산마늘은 출하되는 족족 무섭게 팔려나갔습니다. 희소가치를 염두에 둔 선택이 주효했던 셈이죠. 결국 출하를 시작한 그 해, 3년의 적자를 모두 만회할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3년동안 단 한 푼의 소득도 없었다고 말하는 그, 4년째에는 순수익 1억5천만원가량,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수익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심정섭 천산농장의 경작지 자체가 휴경지였기 때문에 처음 산마늘을 시작할 당시부터 친환경 유기농을 염두에 뒀죠. 인증을 받는 것도 어렵지 않았어요. 그러나 재배방식에 익숙지 않아 실수가 많았습니다. 한번은 유기농 액비를 잘못 줘서 바로 출하해야 할 산마늘이 모두 망가진 적도 있어요. 또 거름을 너무 많이 줬을 때는 산마늘의 향이 약해지면서 야생동물로 인해 쑥대밭이 되기도 했고요.

 

고된 노력 끝에 얻은 첫 성공! 하지만 쭉 탄탄대로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후에도 한동안은 재배과정에서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겪었죠. 포장문제로 난관에 부딪힌 적도 있습니다. 열이 많이 발생하는 산마늘의 특성 탓에 일반 농산물처럼 비닐포장을 하면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잎이 누렇게 뜨거나 물러버렸다고 해요. 문제해결을 위해 고심하던 차에 떠오른 것이 바로 아이스 팩!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심정섭 처음에는 일본의 포장법을 알아봤는데, 우리와는 먹는 법이 달라서 소용이 없더라고요. 일본의 경우는 잎이 아닌 뿌리를 먹거든요. 또 질소 포장을 하는 방법도 생각했는데, 비용 등 부담해야 할 것이 너무 많더라고요. 결국 생각해낸 것이 아이스 팩이었죠. 다른 작물은 아이스 팩을 넣으면 망가지는 게 보통이지만 산마늘은 오히려 더 싱싱해지더라고요.

 

산마늘(명이나물) 재배에 뛰어든 지 어느새 8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심정섭씨는 이제 산마늘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박사가 됐습니다. 모종과 씨앗 생산에 필요한 경작지와 출하를 위한 산마늘 재배 경작지를 구분하고 생산량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노하우도 터득했죠.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후에는 박리다매 전략을 써서 재고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경험으로 터득한 노하우가 첫 번째 성공비결이라면 영업과 판매에 있어 독자적인 노선과 원칙을 세운 것은 두 번째 성공비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산자의 노력을 무시한 채 가격 깎기에만 급급한 대형마트와 백화점 입점은 애초에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소비자 인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굳이 유기농 인증을 고집하지 않은 것도 또 하나의 전략이었죠. 품질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홈페이지를 통해 영업을 시작한 이후 생산된 산마늘은 단 한번의 재고 없이 전량 판매기록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심정섭 초기에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홈페이지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인지도를 높였던 전략이 주효했습니다. 또 산마늘은 그 자체가 농약을 사용하면 안 되는 작물이거든요. 굳이 유기농 인증을 받지 않아도 소비자가 먹어보고 판단할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고요. 덕분에 지금은 농장의 규모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순이익을 2억5천만원까지 달성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제 전부를 알았다고 말하진 못해요. 농사라는 것은 끝이 없다고 생각해요. 20년을 해도 모르겠다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전 아직 8년밖에 안된걸요. 아직도 자신 없는 부분이 더 많아요. 앞으로도 끝없이 노력해야죠.

 

갖은 고생 끝에 산마늘 전문가가 된 심정섭씨는 이제 한국임업진흥원이 임업인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특강의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얻은 노하우를 아낌없이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필사적인 노력 끝에 얻은 결실은 외려 그를 겸손하게 만든 듯합니다.

 

 

 

- 이 글은 한국임업진흥원 사보 '다드림'에 실린 내용을 편집 하였습니다.